[스크랩]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씨줄과 날줄]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푸근한 마음·감동 가득한 손편지
이 가을 가기 전 한 통 써 보내기를"
이승하<시인·중앙대 교수 shpoem@naver.com>
고은의 시 가운데 노래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그중에 김민기가 곡을 붙이고 최양숙이 부른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란 곡이 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렇게 시작되는 곡은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로 끝난다. 가사도 곡조도 참 좋은 곡이다. 그런데 이메일과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로 의사소통을 하는 오늘날, 편지를 쓰는 이는 거의 없다. 연애편지? 글쎄, 편지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연인이 과연 있을까?
함민복은 <자본주의의 사연>이라는 시에서 현대는 편지라는 것의 기능이 사라진 시대임을 강조하였다. “성동구 금호 4가 282번지/ 네 가구가 사는 우편함”이 제1연이고 제2연은 “서울특별시의료보험조합/ 한국전기통신공사전화국장/ 신세계통신판매프라자장우빌딩/ 비씨카드주식회사/ 전화요금납부통지서/ 자동차세영수증/ 통합공과금……” 하면서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이 시대에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 아닌가” 하고 끝맺는다. 편지함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봉투를 보니 다 이렇게 돈을 내라, 무얼 사라고 하는 것들이고 사연 담긴 편지는 한 통도 없어서 자본주의의 사연은 이런 것이려니, 통탄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편지를 도무지 안 쓰는 시대여서 편지 쓰기 숙제를 학생들에게 내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위문편지를 숙제로 써냈듯이. 다음 주까지 가족 중 한 사람에게 꼭 편지를 써서 봉하지 말고 제출하라고 했더니 다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가해서 얼굴 보면 ‘짜식 웬일이래?’ 하면서 환히 반길 것이다, 편지까지 써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자식의 효심에, 누나의 관심에 감격할 것이다, 그 편지 오래오래 간직하며 고마워할 것이다……. 편지의 효용에 대해 아무리 좋게 말해도 학생들은 난감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숙제라고 하니 대다수 학생이 성의껏 써왔다. 자기 집 주소의 우편번호를 모르는 학생이 있었다. 우표 살 곳이 없더라고 우표를 안 붙인 학생, 규격봉투가 아닌데도 300원짜리 우표를 붙여서 갖고 온 학생도 있었다. 이 기회에 교내 우체국의 장소를 알아두라고 했고, 규격봉투가 아니면 우표를 더 붙여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대학생이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편지를 누구에게 써본 적이 없는 학생이 태반이었다. 우체국에 가서 일괄 부치면서 든 돈 몇 천원이 아까웠을 리 없다. 한 여학생의 편지 일부를 소개해도 될지 모르겠다.
“To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민혜에요. 할머니한테 편지는 처음 쓰는 거 같다 그치? 추석에 할머니 뵙고 왔잖아요. 할머니 아픈 모습만 보니깐 너무 속상하더라. 항상 밝고 큰 목소리로 ‘민혜야~”라고 불러주던 할머니였는데 작아진 할머니의 목소리가 세월을 알려주는 것 같았어. (중략) 옛날부터 난 할머니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어. 할머니의 러브스토리, 9남매를 키운 이야기, 6ㆍ25 시절 할머니의 장사 이야기. 난 할머니의 삶이 좋았어. 나라면 할머니처럼 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너무 자랑스러워. 할머니〜 할머니랑 나랑 목욕탕 같이 가던 시절 기억나? 엄마랑은 잘 안 가도 할머니랑 갈 때가 좋았는데. 그때처럼 할머니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젠 누군가에게 업혀야만 어딜 갈 수 있는 할머니의 모습. 당신의 아픈 다리,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다리를 보며 놀라던 할머니의 눈물. 잊을 수가 없네요. 왜 밥도 잘 안 챙겨먹고 그래… 괜히 속상해지네. (하략)”
할머니 곁에서 속닥속닥 말하듯이 정답게 쓴 편지였다. 손녀의 할머니 사랑과 할머니의 손녀 사랑이 진하게 느껴져 따뜻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6ㆍ25전쟁의 와중에 장사를 하며 9남매를 키운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생애가 그려져 있어서 감동은 배가되었다. 몸이 불편하신 그 할머니는 손녀가 보내준 이 편지를 오래 간직하며 감격해하리라.
친필로 쓴 편지는 이렇게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가 할 수 없는 기능을 한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고마워하게 한다. 쓸데없는 정보와 악성댓글이 넘쳐나는 이 시대, 고비사막만큼이나 삭막한 이 시대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한 통 썼으면 좋겠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당신의 마음을 편지로 전하시기를.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노래도 흥얼거리며.
ㅡ<한국경제신문>(2013.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