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작가가 그린 자화상> 이승하 ‘절규하고 싶은…’
<작가가 그린 자화상> 이승하 ‘절규하고 싶은…’
기사입력 2009-04-30 08:30
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어 폐병 앓는 환자로 오해를 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네 친구도 학교 친구도 자기네들 놀이에 나를 끼워주지 않는 것이었다. 쟤랑 놀았다가는 다치게 할 거라는 우려에서였다. 친구들의 놀이를 느티나무 아래서 바라보다가 나는 책을 꺼내들었다.『15소년 표류기』『정글북』『집 없는 천사』『올리버 트위스트』『마경천리』『‘철가면』『소공자』『소공녀』『‘걸리버 여행기』『로빈훗의 모험』……. 그래, 모험을 하자. 중학교 3년 내내 가출을 꿈꾸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계획을 했다.
나는 ‘훤칠한 미남자’인 아버지의 용모도, ‘억센 자립심’의 어머니도 닮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경성사범학교를 다닌 어머니의 총기마저도 닮지 않았다. 아, 아버지를 닮은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후방 치안을 담당하면서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하고자 경찰전문학교를 택한 아버지의 결단력을 나는 닮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뜻대로 승진을 하지 못하자 사표를 내고 반 실업자의 길을 택했고, 그 결단에 따른 자포자기적 삶은 내 사춘기적 방황에 불을 질렀다.
김천고등학교를 두 달 다니고 뛰쳐 올라간 도시 서울의 한 일간지에 내 사진이 실렸을 때, 그에게 붙은 또 하나의 이름은 ‘가출소년’이었다. 가출지 서울 광화문과 부산 초량동의 밤거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취객들과 함께 내달린 밤거리의 살벌함을 기억하고 있다.
문인이 되고 싶었다. 죽어도 글 쓰다 죽고 싶었다. 중학교 때의 은사이신 권태을 선생님은 담임을 맡으신 적이 없음에도 가정방문을 두 번이나 하면서 얘는 공부 시킬 생각일랑 하지를 말고, 책 읽고 글 쓰게 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가셨다 한다.
자퇴생의 신분으로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은 사복을 입고 찾아온 제자를 뜻밖에 아주 밝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수학문제 풀 시간에 책 한 줄 더 읽으라.”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막바지에 피치를 올려 예비고사와 본고사, 실기고사까지 치르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합격을 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어 한 해 휴학을 하고 대학 1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세상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휴학기간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대학 1학년 때맞은 ‘서울의 봄’은 내면을 향해 있던 내 눈을 역사의 지평으로 돌리게 했다. 문무대에서 병영집체훈련을 마치고 귀가했을 때, 광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난 후였다. 나는 문학과 운동 사이에서 전자를 택했고 학우들은 나를 비겁자라고 놀렸다.
한국 근ㆍ현대사는 폭력과 광기의 나날이었다. 공포와 전율의 나날이었다. 그는 서정시를 쓸 수 없었고 현실참여시도 쓸 수 없었다. 새도 쥐도 박쥐도 될 수 없던 시절, 그는 약과 술에 의지하여 4년을 버텼다. 졸업 직전에 중앙일보사에 던진 시 가운데 「화가 뭉크와 함께」가 당선작이라는 연락을 받고, 시상식 다음날 머리를 박박 밀고 훈련소에 갔다. 이 시는 후천적으로 생긴 말더듬이 어법으로 해본, 베트남전 이후의 보트 피플 참사에 대한, 감금과 고문의 역사에 대한 반어적인 질문이었다.
참으로 어두웠던 1983년 연말에 그가 그린 자화상은 화가 뭉크의 그림 「절규」에 나오는 깡마른 사나이, 바로 그 자였다. 신경성위궤양 때문에 늘 토하며 살았다. 소음에 민감하여 솜을 귀에 넣고 자다가 귀가 아파서 깨어나곤 했었다.
21세기인 지금, 국내외 상황이 호전되어 있는가? 정치도 경제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정보사회는 인간에 대한 감시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다. 그는 이제 나이 쉰이 되었고 등단한 지 25년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귀를 틀어막고 절규하고 싶다. 어디서 우, 울음 소리가 들 들려…….
▶시인 이승하는…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화가 뭉크와 함께」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비망록」으로 등단.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생명에서 물건으로』『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등과 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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