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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차례상에는 술 대신 차(茶)를 올려야"

꼬맹이소나무 2013. 9. 20. 05:50

[주간조선] “추석 차례상에는 술 대신 차(茶)를 올려야"

  • 박영철 주간조선 기자
    • 입력 : 2013.09.17 10:15 | 수정 : 2013.09.17 10:20

      
	[주간조선] “추석 차례상에는 술 대신 차(茶)를 올려야"
      일요일이던 지난 9월 8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 내의 불교사찰 ‘열린선원’에서 신도 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석 차례 시연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여느 차례 시연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차례상에 술 대신 차를 올렸다.

      이 선원 주지인 법현 스님은 23년째 차례에 술 대신 차를 올리자는 운동을 펴오고 있다. 그는 “차례(茶禮)는 우리 조상들이 제사 때 기본적으로 차를 올렸기 때문에 차례라고 한 것”이라며 “차 대신 술이 기본이었다면 주례(酒禮)라고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조선시대 영조때부터 차례상에 차 대신 술 올라와”

      글자의 뜻을 살펴보면 맞는 말이다. 스님이 차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추석 무렵의 일이다. 당시 모 일간지에 추석 특집기사가 실렸다. 종교별 차례의식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흥미를 갖고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점점 일그러졌습니다. 유교, 천주교, 기독교 등의 차례의식을 소개했는데 불교의 차례는 언급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스님은 기사를 쓴 기자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져 물었고 기자는 “자료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대답했다. 스님은 이때부터 관련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삼국유사 표훈대덕조(三國遺事 表訓大德條)에 충담(忠談) 스님이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차례의 효시는 이것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명절에 지낸 차례도 결국 그 뿌리가 불교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차 관련 글이 많이 나옵니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나오지요.”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 사신 영접, 왕자(녀)와 태후 등의 서임과 공주의 결혼식, 원자 탄생에도 차례를 지냈을 정도로 차가 성행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았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종묘제례와 중국, 일본 사신에 대한 빈례(賓禮)에 차를 사용한 것이 나오므로 차례는 계속됐다고 봐야 합니다.”

      법현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의 제사에도 차를 쓰는 것이 바른 예법이었다”고 말했다. “유교 예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남송의 주자(朱子)가 차와 관련 있는 고장에서 생활했고 명나라의 구준(丘濬)이 편찬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차를 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재 이목(李穆·1471 ~1498)이 조상께 지낸 제사 홀기(笏記·제사 순서표)에서도 ‘국을 내리고 차를 올렸다(撤羹奉茶)’는 내용이 발견됐다. “이는 종교에 관계 없이 우리 조상들이 기제사와 차례에 차를 올렸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차례를 지내고 술을 나눠 마시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한다. 음복도 차례에서 나온 습관이라고 법현 스님은 말한다. “고려시대에 ‘묘견례(廟見禮)’가 있었습니다. 새로 며느리를 보면 집안의 사당(가묘·家廟)에 고하고 새 며느리가 차를 달여 올렸습니다. 차 달이는 것만 보면 이 며느리의 교양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죠. 차를 올린 후 이 차를 식구들이 나눠 마셨는데 이것을 회음(會飮)이라고 합니다. 회음이 음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집안은 亡하고 차를 마시는 집안은 興한다”

      언제부터 차례에 차가 빠지고 대신 술이 쓰이게 됐을까? 스님은 “조선 영조 때부터”라고 말했다. “사회·경제적 이유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이유로 국가 경제가 피폐해지고 특히 임진왜란 때 일본이 도공들을 다 끌고 갔기 때문에 영조는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해서 왕명을 내렸습니다. 귀하고 비싼 차 대신에 술이나 뜨거운 물, 즉 ‘숭늉’을 대신 쓸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후 차례에 술이 등장하게 됐지요.”

      스님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다. 1991년부터 불교 차례의식 자료를 만들어서 언론사들에 보냈다. 1997년에는 서울 정릉의 천중사에서 제1회 불교차례의식 시연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2005년에는 보조사상연구원 정례세미나에서 발표도 했다. 또 2005년 6월 현재 자리에 열린선원을 개원한 후로는 해마다 설·추석 때 차례의식 시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곧 추석이다. 스님은 “설·추석 명절 때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정답게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한잔 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입니다. 그러나 술 때문에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생각보다 큰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고 봅니다. ‘술을 마시는 민족(집안)은 망하고 차를 마시는 민족(집안)은 흥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최근 4년 동안 설 연휴 때 모두 304명의 교통사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중 18.4%에 해당하는 56명은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명절 때 술 때문에 발생하는 가족 간의 다툼도 적지 않다.
      
	지난 9월 8일 열린선원에서 열린 추석 차례 시연회. photo 열린선원
      지난 9월 8일 열린선원에서 열린 추석 차례 시연회. photo 열린선원
      스님은 술로 인한 사건 사고를 떠나서 차례의 근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차례를 지냅니까? 차례는 조상을 섬기는 의식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조상을 모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차례는 물론 기제사 때 술 대신 차를 올려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차례는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에 종교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와 전통방식에 따라 하되 차를 쓰면 됩니다. 술을 꼭 올려야겠다면 술을 먼저 올리고 차를 올려도 됩니다.”

      그러면 어떤 차를 올려야 할까. 스님은 “어떤 차라도 관계없다”고 했다. “지금은 조선시대와 달리 차값이 쌉니다. 차를 올린다고 꼭 비싼 차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차례에 커피를 올려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까 가능하면 국산차가 좋겠지요.”

      스님이 20여년간 줄기차게 차례 원형 회복 운동을 해온 덕분에 우리 사회에는 스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내년부터는 외부와 제휴해서 ‘차례 때 차 올리기’ 캠페인을 전개할 생각이다. “지금까지는 저 혼자서 차 올리기 캠페인을 해왔는데 혼자서는 한계가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년 설부터는 다른 종교나 뜻있는 기업, 공공기관과 손잡고 차 올리기 운동을 펼쳐나가려고 합니다.”.